편리한 세상 <21.07.08>
‘띠-띠-띠-띠-띠리릭-’
‘철컥’
‘하.....’
지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. 아직도 비가 내리는 가운데 날은 아직 금요일의 끝자락에 머물고 있었다.
“이젠 배도 안 고프네..뭐 먹지?”
프로젝트 마감이 다가오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. 수당 따위 나오지 않는 무료봉사는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였고, 어릴 때도 경험해보지 못한 주 6일제를 이제야 경험해보고 있는 요즘이었기에 이번 주말 만큼은 온전한 이틀의 자유 시간을 갖고 싶었던 지윤이었다.
‘틱-틱-틱’
어제 먹고 남은 눌어붙은 밥을 뒤로한 채 스마트폰 배달 어플로 능숙하게 음식을 주문하는 지윤이었다. 치킨을 선택한 뒤 옵션 목록에 있는 생맥주 1000cc에서 멈춘 엄지손가락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지만, 이내 평정을 되찾은 듯 주문하기 버튼으로 빠르게 내려갔다.
“아무리 아가리 다이어터라도 술은 줄이자..낼 드디어 헬스장 가보겠구나~”
주문을 마친 뒤 힘껏 기지개를 켜는 지윤의 표정이 한껏 밝다.
"기가지니~"
“예 주인님.”
“멜론차트100 랜덤재생~”
이내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고, 그 것을 집어 들고 입은 옷을 대충 흩뿌린 채로 지윤은 욕실로 향했다.
‘띵-동’
“예 잠시만요~”
시간은 어느덧 토요일의 초입을 지나가고 있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주말의 여유에 한껏 들뜬 지윤이었다. 평소 순살 치킨을 자주 시켜먹었던 그녀가 시킨 뼈 있는 치킨이 그 여유를 반증해주는 듯 했다. 치킨을 양껏 베어 문 뒤 느끼함을 가시게 해줄 생맥주는 없었지만, 창문에 부딪히는 빗소리마저 좋은 지윤이었다.
“세상 참 좋아졌다..커피 한 잔도 주문이 되고.”
늦은 새벽이었지만 식사를 마친 뒤 마시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참을 수 없는 지윤이었다. 더 거세진 빗줄기에 배달을 하는 기사들의 안위가 잠깐 염려됐지만, 주문한지 10분 만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는 그 생각을 말끔히 사라지게 해줬다.
‘따르르릉’
“여보세요?”
“엄마다.”
“어? 이 늦은 시간에 왜?”
“너 야근한다 해서 전화해봤지.”
한껏 주말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와중에 뜬금없다고 생각한 지윤이었다. 시간도 시간이었거니와, 주말에는 암묵적으로 부모님과 서로 연락을 잘 안 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.
“넌 어떻게 된 게 전화 한 통이 없니? 살아있긴 하니? 요즘 세상이 흉흉한데 서울 살이 하는데 걱정 되잖니.”
“아이 엄마도 참, 요즘 프로젝트 마감기간이라 바빴던 거 알잖아. 어떻게 전화를 해?”
“짧게라도 할 순 없었던 거니? 너 집에는 언제 내려올거야?”
“곧 추석이잖아, 그 때 내려가겠지 뭐.”
“넌 2달 후가 곧 이니? 설에 왔다가 한 번도 안 내려오고선, 추석 때 온다고? 우린 뭐 명절에만 보는 관계니? 오작교도 아니고..”
“아니 엄마 나 일마치고 이제 밥 먹었어.. 피곤해 죽겠는데 나 쉬게 좀 해주면 안 돼?”
주말의 여유가 깨진 것도 있었지만 진짜로 피곤하기도 했던 지윤이다. 처음 올 때만 해도 기대에 부풀었던 서울 살이었지만, 어느새 그녀도 여느 직장인과 다를 바 없는 무기력한 일상에 적응된 것이다.
“엄마는.. 네가 이제 뭐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. 그래서 너 집 오면 외식하러 가는 거고. 옛날에는 네가 뭘 좋아하고, 뭐할 땐 뭐 해야 하고, 습관 하나하나 다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정말 밖에 내놓은 자식 같잖니..아빠한텐 연락 하긴 하니?”
“아니, 아빠도 일 하니까 가끔..”
“휴..너에게 우리 가족은 뭐니?”
그 때까지 피곤에 쪄들어 소음으로 들리던 엄마의 소리가 갑자기 또렷이 들려오기 시작했다. 그리고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한 지윤이었다. 집 갈 때마다 집 밥이 최고라고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, 이제는 마지막으로 먹어본 집 밥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.
그리고 갑자기 집에 머물고 있었을 때가 생각났다. 길어지는 취업 준비생 생활과 친구들의 연이은 상경, 그리고 간간히 들려오는 그 친구들의 결혼소식까지. 그 때는 하루라도 빨리 집을 나오고 싶었는데, 그래도 한 식탁에서 가족들이 식사를 함께할 때면 언제나 격려해주던 부모님과 그에 비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남동생이 있었다. 그때는 식탁이 크게 느껴졌는데, 지금 자신 앞의 원탁은 상당히 작아 보인다고 생각한 지윤이었다.
“…미안해 엄마, 난 그런지도 모르고..”
“아냐 내가 괜한 말 했지. 나이 들어서 그러니까 네가 이해 좀 해주고..나도 너 부담주고 싶지 않아. 그래도 내 자식인데 가끔 안부정돈 듣고 싶어서 하소연 해본 거란다..”
아메리카노가 담긴 플라스틱 컵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마치 자기 등골에서 흐르는 식은땀 같다 생각한 지윤이었다. 끊임없이 내리는 빗속에서 두 모녀의 대화는 멈췄고, 반대로 지윤은 골똘히 깊은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.
“기가지니~”
오랜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.
“네 주인님~”
“…꺼져.”
“전원 종료할까요?”
“내일 모레까지 꺼져 좀.”
그렇게 남은 침묵을 뒤로 하고 지윤은 침실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. 그리고 넌지시 생각했다. 프로젝트가 없는 다음 주 주말은 오랜만에 집에 가봐야겠다고.